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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항암

면역항암제의 핵심 열쇠, PD-L1: 치료의 판도를 바꾼 임상 데이터

by 로아* 202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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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는 생각보다 훨씬 교활하다. 이들은 면역세포의 눈을 속여 자신을 '아군'으로 위장하는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는데, 그 중심에 바로 'PD-L1'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이 글은 3세대 항암제로 불리는 면역항암제가 어떻게 암세포의 위장술을 무력화시키는지, 그리고 그 효과가 실제 임상 데이터에서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PD-L1 발현율에 따른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깊이 있게 탐구한다.

목차

  1. 우리 몸의 파수꾼, 면역 T세포와 '면역관문'
  2. 암세포의 위장술: PD-1과 PD-L1의 만남
  3. 위장을 벗겨내는 영웅의 등장: 면역관문억제제
  4. 숫자로 증명된 PD-L1의 가치: 실제 임상 결과
  5. 모든 환자에게 통하지는 않는 이유: PD-L1의 한계와 과제
  6. 미래를 향하여: PD-L1을 넘어선 새로운 전략

1. 우리 몸의 파수꾼, 면역 T세포와 '면역관문'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 특히 T세포는 외부 침입자나 비정상 세포(암세포 등)를 식별하고 제거하는 특수부대와 같다. T세포는 끊임없이 온몸을 순찰하며 적을 찾아 공격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 강력한 군대가 아군, 즉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나 루푸스 같은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정교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면역관문(Immune Checkpoint)**이다.

면역관문은 T세포의 표면에 있는 일종의 '브레이크' 장치다. 정상 세포들은 이 브레이크를 누를 수 있는 신호(단백질)를 가지고 있어서, T세포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도록 만든다. "나는 공격 대상이 아니야"라는 신분증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 덕분에 T세포는 적군과 아군을 정확히 구별하며 과도하게 활성화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2. 암세포의 위장술: PD-1과 PD-L1의 만남

문제는 교활한 암세포가 바로 이 면역관문 시스템을 악용한다는 점이다.

  • PD-1 (Programmed cell Death protein 1): 활성화된 T세포 표면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면역관문 수용체(브레이크 장치)다.
  • PD-L1 (Programmed Death-Ligand 1): PD-1과 결합하여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리간드(손)다. 원래는 일부 정상 세포에 존재하며 면역 균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암세포는 살아남기 위해 유전적 변이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상 세포인 척 위장하기 위해 PD-L1 단백질을 자신의 표면에 다량으로 발현시킨다. 암세포를 공격하러 다가온 T세포는 암세포 표면의 PD-L1을 발견하고, 자신의 PD-1 수용체와 결합하게 된다.

이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 T세포의 브레이크가 강하게 밟힌다. T세포는 암세포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공격을 멈추거나 스스로 사멸하게 된다. 암세포가 '투명 망토'나 '가짜 신분증'을 이용해 면역 감시망을 완벽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암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다른 장기로 전이될 힘을 얻게 된다.


3. 위장을 벗겨내는 영웅의 등장: 면역관문억제제

과학자들은 암세포의 이러한 회피 전략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PD-1과 PD-L1의 결합 자체를 막아버리는 **면역관문억제제(Immune Checkpoint Inhibitor)**의 개발이다.

면역관문억제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1. Anti-PD-1 항체 (예: 키트루다, 옵디보): 이 약물은 T세포의 PD-1 수용체에 대신 달라붙는다. T세포의 '브레이크'를 미리 코팅해 버리는 셈이다. 따라서 암세포의 PD-L1이 다가와도 결합할 자리가 없어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게 된다.
  2. Anti-PD-L1 항체 (예: 티쎈트릭, 임핀지): 이 약물은 암세포 표면의 PD-L1 단백질에 달라붙는다. 암세포가 내미는 '가짜 신분증'을 가려버리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T세포의 PD-1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방식이든 핵심은 PD-1과 PD-L1의 물리적 결합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이들의 방해 공작이 막히면, T세포는 족쇄가 풀린 것처럼 다시 활성화되어 본래의 임무대로 암세포를 적으로 인식하고 강력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는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기존 항암제와 달리,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이용해 암을 치료하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4. 숫자로 증명된 PD-L1의 가치: 실제 임상 결과

"PD-L1 발현이 높으면 면역항암제 효과가 좋다"는 말은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수많은 환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임상 연구의 '숫자'로 명확히 증명되었으며, 오늘날의 암 치료 표준을 바꾸는 근거가 되었다. 특히 비소세포폐암(NSCLC) 1차 치료 영역에서 진행된 KEYNOTE-024 연구는 그 대표적인 예다.

사례 1: 판도를 바꾼 KEYNOTE-024 연구 (PD-L1 TPS ≥ 50%)

이 연구는 이전에 치료받은 적 없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 중, 암세포의 PD-L1 발현율(TPS)이 50% 이상으로 매우 높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한 그룹은 면역항암제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를 단독 투여받았고, 다른 그룹은 기존의 표준 치료법인 백금 기반 항암화학요법을 받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 전체 생존기간 (Overall Survival, OS): 환자들의 생존기간 중앙값을 비교했을 때, 항암화학요법 그룹은 13.4개월이었던 반면, 키트루다 그룹은 26.3개월두 배 가까이 길었다.
  • 5년 생존율: 치료 후 5년이 지났을 때 생존해 있는 환자의 비율을 보면, 항암화학요법 그룹은 **16.3%**였지만, 키트루다 그룹은 **31.9%**에 달했다. 4기 폐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이 두 배 가까이 높아진 것이다.
  • 사망 위험 감소: 키트루다는 항암화학요법 대비 사망의 위험을 약 38% 감소시켰다 (Hazard Ratio=0.62).

이 데이터는 PD-L1 발현이 50% 이상인 환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화학요법 대신 면역항암제를 먼저 사용하는 것이 훨씬 우월한 치료법임을 입증했다. 이 연구 결과로 인해 전 세계 암 치료 가이드라인이 바뀌었고, PD-L1 검사는 폐암 치료의 필수적인 첫 단계가 되었다.

사례 2: KEYNOTE-042 연구 (PD-L1 TPS ≥ 1%)

그렇다면 PD-L1 발현율이 아주 높지 않은 환자들에게는 효과가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을 준 것이 KEYNOTE-042 연구다. 이 연구는 대상을 PD-L1 발현율 1% 이상인 환자들로 넓혔다.

결과는 PD-L1 발현율에 따라 치료 혜택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 PD-L1 TPS ≥ 50% 그룹: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은 키트루다 그룹 20.0개월 vs. 화학요법 그룹 12.2개월로, KEYNOTE-024와 유사하게 큰 차이를 보였다.
  • PD-L1 TPS ≥ 1% 전체 그룹: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은 키트루다 그룹 16.7개월 vs. 화학요법 그룹 12.1개월로, 여전히 키트루다 그룹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생존 이득을 보였다.

즉, PD-L1 발현율이 1% 이상이기만 해도 면역항암제의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그 혜택의 크기는 발현율이 높을수록(≥50%)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이처럼 PD-L1 발현율은 치료 효과를 예측하고 가장 적절한 치료 전략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나침반 역할을 한다.


5. 모든 환자에게 통하지는 않는 이유: PD-L1의 한계와 과제

앞서 살펴본 임상 데이터는 PD-L1의 중요성을 명백히 보여주지만, 이것이 완벽한 예측 도구는 아니다.

  • 불완전한 예측력: PD-L1 발현율이 낮거나 음성(0%)임에도 면역항암제에 좋은 반응을 보이는 환자가 있고, 반대로 발현율이 매우 높아도 전혀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암의 면역 회피 기전이 PD-L1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종양의 이질성(Heterogeneity): 하나의 종양 덩어리 내에서도 부위마다 PD-L1 발현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조직검사를 위해 떼어낸 작은 부위가 전체 종양의 특성을 대표하지 못할 수 있다는 문제다.
  • 역동적인 발현: PD-L1 발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치료(방사선, 화학항암제 등)나 종양의 상태에 따라 계속 변할 수 있다. 특정 시점의 검사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어렵다.

6. 미래를 향하여: PD-L1을 넘어선 새로운 전략

PD-1/PD-L1 경로의 발견은 암 치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현재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병용 요법: 면역관문억제제와 기존의 화학항암제, 표적항암제, 방사선 치료 등을 함께 사용하여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서로 다른 기전의 치료법이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 새로운 바이오마커 탐색: 종양변이부담(TMB), 불일치 복구결함(dMMR) 등 PD-L1 외에 면역항암제 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또 다른 지표들을 발굴하고 임상에 적용하고 있다.
  • 새로운 면역관문 발굴: PD-1 외에도 CTLA-4, LAG-3, TIM-3 등 T세포의 기능을 억제하는 다양한 면역관문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표적으로 하는 새로운 면역항암제들이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PD-L1은 암세포가 면역체계를 속이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위장술'이자, 면역항암제 치료의 성공 가능성을 실제 임상 데이터로 증명한 핵심적인 '나침반'**이다. 비록 한계점은 존재하지만, PD-L1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암을 정복해나가는 여정에서 거대한 진전을 이루게 한 결정적 열쇠임이 분명하다. 앞으로도 이 교활한 단백질을 둘러싼 연구는 더욱 정교한 개인 맞춤형 암 치료의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출처:

  • Reck, M., et al. (2021). Five-Year Outcomes With Pembrolizumab Versus Chemotherapy for Metastatic Non–Small-Cell Lung Cancer With PD-L1 Tumor Proportion Score ≥ 50%. Journal of Clinical Oncology. (KEYNOTE-024)
  • Mok, T.S.K., et al. (2019). Pembrolizumab versus chemotherapy for previously untreated, PD-L1-expressing, locally advanced or metastatic non-small-cell lung cancer (KEYNOTE-042): a randomised, open-label, controlled, phase 3 trial. The Lancet.
  • National Cancer Institute (NCI). "Immune Checkpoint Inhibitors". cancer.gov
  • Ribas, A., & Wolchok, J. D. (2018). Cancer immunotherapy using checkpoint blockade. Science, 359(6382), 1350-1355.
  • 대한종양내과학회 (KACO). 항암치료 및 최신 약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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